
한나라의 공식적인 표상으로서 우리나라는 태극기·애국가·무궁화·국새·나라문장을 국가상징으로 하고 있습니다.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20주년과 동아시아 미래비전 기념식 만찬사 (서울 플라자호텔)
기자들이 이렇게 많이 오실 줄을 알았더라면 원고를 가져왔어야 되는데 제가 그러질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매우 개인적인 경험들을 실무적인 원고로 옮겨 쓴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요, 결국은 제가 써야 되는데 그럴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좀 두서가 없더라도 즉석에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선 일본에서 와주신 누카가 후쿠시로 회장님을 비롯한 일한의원연맹 동지 여러분,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또한 강창일 회장님을 비롯해서 한국의 한일의원연맹 의원님들 그리고 양국관계를 오랫동안 지도해주신 일본의 와다 하루키 선생님, 오코노기 마사오 선생님, 권노갑 고문님과 이종찬 고문님, 모두모두 감사드립니다. 김대중 평화센터 부이사장이신 박지원 선배님, 고려대학과 연세대학, 제 아들이 고려대학을 나왔습니다. 두분 총장님들, 그리고 이희호 여사님께 이렇게 잔칫날 통화는 드렸습니다마는 오늘 나오시지 못한 게 아쉽습니다. 여사님을 대신하여 오신 가족 여러분, 반갑습니다.
김대중-오부치 시대가 왜 그렇게 좋았던가? 또는 무엇이 좋았던가? 하는 것은 많은 논의가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것을 제가 반복하는 것은 자제하고요. 제가 볼 때 두 지도자의 어떤 것이 전후 양국관계를 가장 최대로 좋은 시기로 만들었는가. 저는 평소부터 김대중 대통령님의 균형과 결단, 그리고 오부치 게이조 총리의 배려와 결단, 이 두 가지의 덕목이 상승효과를 내서 최량의 양국 관계를 만들었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김대중 대통령께서는 한일 관계뿐만 아니라 다른 문제에서도 항상 균형을 중요시하는 분이십니다마는 한일 관계에 있어서 이런 균형을 놓치지 않으려고 늘 노력을 하셨습니다.
첫째는 과거와 미래의 균형, 그리고 일본을 볼 때 전전의 일본과 전후의 일본의 균형, 이 두 가지를 항상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셨습니다. 조금 전에 누카가 후쿠시로 회장님께서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의 일본 의회 연설을 말씀해주셨지만 놀라운 균형이 거기에 반영이 돼 있습니다. 물론 우리 최상용 대사님께서 도와주셔서 “기적은 기적처럼 오지 않습니다.”라는 역사에 남을 명문도 있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전전의 일본과 전후의 일본을 우리가 균형 있게 봐야한다. 특히 전후의 일본을 통해서 한국이 의회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를 배웠던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전전의 불행한 일에 대해서도 양쪽의 문제들을 균형 있게 봐야한다.”이런 말씀들을 끊임없이 하셨습니다. 그리고 과거와 미래의 균형을 누카가 회장께서 말씀해 주셨는데 사실은 대통령의 그런 생각에는 꽤 깊은 뿌리가 있습니다. 1994년이었던 것으로 기억을 합니다. 김대중 대통령께서 정계를 은퇴하시고 영국에 유학 가셨다가 돌아오신 직후에 아태평화재단을 만드셨던 그 초기입니다. 그때 일본 내셔널프레스센터로부터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인데 저는 그 때 동아일보 기자였습니다마는 선생님으로부터 좀 와보라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동교동 자택에 갔더니 아주 이 정도로 두꺼운 원고를 저한테 주시면서 이 원고 좀 고치라고 그래서 “무슨 원고입니까?” 여쭸더니 “일본 내셔널프레스센터에 가서 연설할 원고다.” 이걸 좀 이기자가 고치라고 하니까 “아니. 선생님이 쓰신 원고를 제가 어떻게 고칠 수 있겠습니까? 못합니다.” 그랬더니 “그럼 한 가지 물어보자.”하고 물으신 질문이 이거였습니다. “흔히들 한일관계를 말할 적에 한국은 과거에 너무 집착하고 일본이 늘 미래지향을 말하는 것으로 되어있는데 이것을 바꿔서 하면 어떨까?” 이렇게 저한테 물으시는 겁니다. 그래서 “선생님 그걸 어떻게 바꿀 수 있습니까?” 했더니 “한국이 미래지향을 강조하고 일본이 과거를 좀 더 보게 하는 이렇게 하자고 제안하면 어떨까? 그런 메시지를 이 원고에 담고 싶은데 어떤가?” 그래서 “될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참 신선한 아이디어 같습니다.”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생각이 줄곧 한일관계에 대한 그 분의 고민 속에 있었고 그것이 1998년 아마도 일본 의회에서 했던 연설 중에 가장 일본이 명연설로 기억하는 그 연설로 되어 있었고, 또한 그런 생각이 오부치 총리와 함께 했던 파트너십 공동 선언에 반영이 되어 있습니다. 과거에 대한 제대로 된 반성과 미래지향적인 의지 이런 것이지요.
오부치 게이조 총리님은 제가 아까 배려와 결단이라고 말씀드렸는데, 그 분 재임기간이 기대만큼 길지 않았습니다마는 야스쿠니 신사에 한 번도 참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 있었던 이른바 근린조항, 역사를 기술할 때 이웃나라를 배려해야 한다고 하는 근린조항을 가장 정확히 지키신 정권이 바로 오부치 정권이었습니다. 그 후로 일본 내에서 “센고가 오왔다.(戦後が 終わった.)”, “전후는 끝났다.” 이런 생각이 있고 근린조항이 흐지부지 되고 야스쿠니 참배가 그다지 신중하지 않아도 되는 문제인 것처럼 그렇게 변질되는 것이 몹시 안타깝습니다마는 바로 그러한 배려의 결단이 있었기 때문에 최강의 한일관계를 만들 수 있었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 당시에 파트너십 공동선언이나 일본 의회 연설 못지않게 중요한 몇 가지의 역사를 시작했습니다. 조금 전에 누카가 회장님이 언급하셨지만 한중일 정상회의의 정례화가 그때 시작이 됐고 또 하나는 많은 분들이 잘 모르실지 모르겠습니다. 한일지사협의회가 그 때 처음 발족을 했습니다. 그래서 지방자치 풀뿌리 차원에까지 교류와 협력을 확산하자는 것이 그 때 처음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 때 일본의 지사협회 회장님이 사이타마 지사였던 스치야 요시코 전 참의원 의장님이셨습니다. 그 분이 서울에 와서 대통령을 예방했을 때 한일지사협의회를 만드신다고 제안을 했고 김대중 대통령께서 즉석에서 그걸 수락을 해서 지사협의회가 그 때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양국 간에 그런 좋은 관계가 이어져서 2002년 월드컵 공동개최를 참으로 감동적으로 이뤄냈던 것이 바로 그 때까지가 불행하게도 월드컵 때는 오부치 총리님이 계시지 않았더랬습니다마는 우리가 그냥 글로만 아는 좋았던 시절이 아니고 참으로 우리가 과제로 삼아야할 만한 좋았던 시대였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 때 양국관계가 얼마나 좋았던가 하는 것을 드러낼만한 에피소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때 제가 동아일보에 논설위원이었거나 국제부장이었거나 기억이 좀 왔다 갔다 합니다만 1999년에 오부치 총리가 서울에 오셨더랬습니다. 주한일본대사관의 어떤 외교관과 제가 깊은 신뢰관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때 둘이 모의를 했습니다. “오부치 총리가 서울에 오시면 뭔가 획기적인 사건을 하나 만들자.”고 해서 둘이 짠 것이 이거였습니다. 오부치 총리가 서울 방문 이틀째 되던 날의 일정 가운데 고려대학교 특강이 있었습니다. 그 고려대학교 특강을 마치고 숙소인 롯데호텔로 돌아오시게 되어있는데 돌아오시는 도중에 이건 하나의 우발적인 사건인 것처럼 만들자. 둘이 모의한 게 바로 그겁니다. 고려대학교에서 롯데호텔로 오는 길에 동국대학교가 있습니다. 우리 장충식 총장님 혹시 나와 계신가요? 동국대학교 앞에 유관순 동상이 있습니다. 그래서 일본외교관과 제가 모의한 것은 우연을 빙자해서, 우연인 것처럼 가장해서 오부치 총리께서 고려대학교에서 롯데호텔로 가시는 길에 동국대학교 앞에 있는 유관순 동상 앞에 꽃 한 송이를 바치는 건 어떨까. 둘이 상당히 준비를 많이 했었더랬습니다. 그 외교관은 도쿄에 있는 일본 외무상과 함께 상의를 하고, 저는 이제 세기적인 특종은 하겠다. 물론 정상의 동정이라면 특종은 안됩니다마는 준비를 미리 할 수 있는 기간이 충분했기 때문에 이제 후배 기자들을 통해서 한 신문으로 5개면 정도를 쓸수 있는 분량의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런데 오부치 총리가 한국 방문하시기 바로 전날 일본 외교관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전화를 받았더니 "이상, 역시 안되는구만요" 동경본부에서 안되겠다고 통보했다는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게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외교관과 기자 사이에 그런 모의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런 모의가 여러 주 동안 계속될 수 있었을 정도로 좋았던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참으로 아쉽긴 하지만 좋았던 시절이 생각납니다.
제가 아까 결단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사실은 생각만으로 국제관계, 대외관계를 개선한다는 게 쉽지 않습니다. 지도자들께서 때로는 국내적 반발을 무릅쓰고 결단할 때는 해야 됩니다. 그것이 지금 지도자들께 충분히 있는가. 바로 이것이 저로서도 몹시 아픈 대목입니다. 저도 어쩌다, 한국에는 ‘어쩌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쩌다 공무원’ 이런 식의 말이 있는데, 어쩌다 지도자 중 한 사람이 됐습니다. 그런 연유로 많이 자문하고 있습니다만,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내렸던 결단의 제일 첫 번째는 일본 대중문화에 우리 시장을 열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국내에 많은 반발이 있었고 국내 대중문화가 거의 붕괴될 것 같은 위기감도 있었습니다마는 김대중 대통령이 그 결단을 하셨습니다. 그 결과는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오히려 한류가 싹트게 되는 그런 시작이 되었습니다.
또 하나가 양국관계를 이렇게 우발적인 사고가, 양국관계를 망가뜨리지 않게 하는 작지만 큰 결단이 있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이런 가이드라인을 제시했었습니다. 역사의 인식과 관련된 일본 정치인들의 잘못된 발언, 그것을 한국에서는 망언이라고 부릅니다만 “망언이 나왔을 때 모든 망언에 대해서 반응하지 말고 각료급 이상의 망언에 대해서만 경청을 하고 각료급 이하의 망언은 무시하자.” 이런 기준을 김대중 대통령이 직접 제시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언론계에서 약간 의아스러워하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마는 하다보니까 매우 좋은 결과를 낳고 우리 언론부터 성숙해질 수 있었고 일본의 각료급 이상들은 말조심을 좀 하게 됐고 일거양득의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런 그 세세한 지혜들이 어떻게 나왔을까? 하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 이 시대에 국가를 지도하고 있는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참으로 반성해야 될 게 많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김대중 대통령님의 그런 양국 관계에 대한 깊은 생각은 기본적으로 오래된 오랜 기간의 생각입니다. 그리고 공부에서 기인했다고 생각을 합니다.
김대통령이 가택 연금기간이었던 시대, 그 시기에 에피소드 하나를 더 얹어드리고 제 말씀을 마치고자합니다. 그게 몇 년도였는지는 기억이 안 납니다. 분명히 기억하는 것은 재일 여류작가 이양지, 일본 이름으로 요시에라는 분이 아쿠타가와상인가를 받았던 그 무렵입니다. 바로 이양지 작가가 일본의 양대 문학상 중에 하나를 받고 며칠 뒤에 서울 주재 일본특파원들이 동교동에서 점심을 먹는 일이 있었습니다. 약속은 이양지 여사의 수상 이전에 있었지만, 점심 행사는 수상 이후였습니다. 그때 특파원들 십수 명이 동교동에 가서 점심을 함께 했는데 갑자기 김대중 대통령께서 일본어로 일본의 양대 문학상, 아쿠타가와상과 나오키상 수상작의 경향이 이렇게 다르다고 설명하시고 각자의 문학상 수상작의 경향도 시대에 따라서 이렇게 달라져갔다. 이걸 쭉 설명하셔서 일본특파원들이 뒤로 넘어질 뻔, 겨우 넘어지지 않았다하는 얘기를 일본특파원으로부터 들었습니다. 그런 것은 뭐 다른 정치인들은 도저히 흉내를 내려 해도 낼 수가 없는, 참 엄청난 일인데 저도 어쩌다 지도자 중에 말씀을 드리겠습니다만 김대중 대통령님의 그런 박학함에 대해서는 따라가는 걸 포기했습니다.
단지 여기 한국 분들이 많으니까 저의 아재개그로 오늘 만찬사를 마치겠습니다. 김대중 대통령님은 박학다식한분이었지만 저는 또 다른 의미에서 박학다식합니다. 왜냐하면 공부는 박약, 엷더라도 식사는 많이 한다. 제가 생각하는 박학다식입니다. 감사합니다.
첨부:김대중오부치공동선언 20주년과 동아시아 미래비전 기념식 만찬사